덕유산, 2026
작년 마지막 여행으로 계획했던 덕유산 일정을 다녀왔다. 멋진 광경을 눈으로, 사진으로 품겠다며 다짐했건만, 늙은 몸이 말을 듣지 않아 2026년 첫 여행이 되었다. 날씨 운이 좋지 않았던 작년의 경험으로 이번에도 ‘운’을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출발 전날 금요일 저녁, 준비하는 중에도 갈까 말까 고민을 수십 번은 한 것 같다. 손과 머리가 분주했다.. 날씨가 안 좋으면 어쩌지? 일요일 한파가 몰아친다는데, 얼어 죽으면 어쩌지? 등산이라 부를 만큼 긴 산행은 아니지만 몸에 다시 무리가 가면 어쩌지? 손이 바쁘게 짐을 챙기며, 머릿속으로는 고민이 마구잡이로 엉켜붙어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일단 아무 생각 없이 챙긴 짐을 문 앞에 두고 일찌감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 뜨니 새벽 4시, 출발까지는 6시간이나 남았건만. 요즘 부쩍 새벽에 깨는 경우가 많다. 아니, 매일 2, 3시에 깨고 나면 하루 종일 힘들다. 잠들기 전에 과일을 너무 많이 먹은 게 문제일까? 어제도 주먹만 한 레드향을 3개나 먹고 잤더니 오늘도 어김없다. 자기 전에 먹는 건 건강에 좋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이것도 중독인가? 매주 글을 쓰고, 이주에 한 번씩 모이는 ‘창밖은 겨울’ 글쓰기 모임에서 출발하지도 않은 등산 이야기를 썼었더랬다. 다른 분들의 기대를 이번에는 충족시켜 주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을 보면,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는 모양이다. 쉽게 잠들지 못하는 새벽, 이번에는 기필코 가겠노라며 진작부터 옷을 입고 출발 시간까지 대기하다 출근길을 나섰다. 무주로 향하는 버스는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한다. 출근길과 같은 코스라 익숙하지만, 허름한 남부터미널은 처음이라 생소하다. 가건물처럼 여태 버티고 있는 모습에 존경심마저 든다. 배낭은 버스 짐칸으로 쏙, 카메라와 보조배터리, 각종 잡동사니가 담긴 크로스백은 발밑에 놓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왜 덕유산, 눈꽃 세상을 보고 싶은지 생각하며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달리는 버스 안의 지루함을 달랬다. 무주에 가까워질수록 회색빛의 하늘 속에서 작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저 멋진 풍경을 보고 싶은 것일까? 그게 전부이지만, 거대한 자연 속에서 티도 나지 않은 나의 존재를 느끼고 싶은 것일까? 가보면 알겠지. 덕유산 능선까지 곤돌라를 타고 올라간다. 왕복이 아닌 편도 티켓을 구매했다. 내일 일출을 보고 내려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돌아갈 곳 없는, 정처 없이 떠나온 사람 마냥 낡고 흔들리는 곤돌라에 올랐다. 그곳은 하얀 세상이었다. 하늘은 구름과 안개로 가득한 곰탕이다. 산 밑의 리조트나 마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시야가 10m도 되지 않는 풍경마저 경이로웠다. 아니, 정확히는 암울했다. 잠들기 전 어두운 밤, 하루를 시작하기 전 새벽의 감정을 이곳에서 동일하게 체감했다. 곤돌라 덕분에 접근성이 좋은 덕유산은 사람이 많았다. 눈이 쌓인 등산로에는 아이젠을 착용한 사람들이 줄지어 오르고 있었다. 마치 퇴근길 9호선 고속버스터미널 역에서 급행 지하철을 기다리는 것처럼. 꼭대기인 향적봉에는 2개 정상봉이 있다. 인증사진을 찍기 위해 그 험한 날씨에도 줄지어 대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오늘 밤은 덕유산과 함께하기에 즐겁게 사진 찍는 사람들을 지나 향적봉 대피소로 향했다. 잠깐의 휴식과 잠자리 정리 후 다시 오른 봉우리는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인류의 새로운 터전을 찾기 위해 떠난 사람 중 만 박사가 사는 행성 같았다. 강력한 바람과 눈보라는 여전히 시야를 닫고 고립시켰고, 미끄러운 바닥은 한치도 방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고어텍스 재킷이 바람을 막아주지만, 통과시키지는 못한다. 바람에 휘청거리는 몸뚱이는 자연에 맞서기보다 포기를 택하고 최대한 몸을 압축시킨 상태로 정상에서 내려왔다. 준비한 식사를 마치고 대피소의 점등 시간인 9시에 맞춰 눈을 감았다. 많은 이들은 철저한 준비를 마치고 산을 정복하기 위해 오르지만, 정복은 자만이고 함께하기 위해 올랐다는 생각에 덕유산과의 첫 만남은 끝이 났다. 아침 등산을 준비하는 분들의 부스럭거림에 눈이 떠졌다. 일찌감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출을 보기 위해 장비를 챙겨 나갔다. 정상으로 갈 수도 있지만 대피소 근처 높은 곳에 삼각대를 세우고 기다렸다. 조금씩 불그스름한 일출의 노을이 동쪽 하늘에서부터 물들기 시작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풍경에 눈물이 흘렀지만 얼어붙을까 봐 걱정했지만 강한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2026년에 11번째 날이지만 나에게는 첫 새해 일출을 맞이하는 날이다. 더군다나 어제와 전혀 다른 맑은 날씨 덕에 엄청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점점 밝아지는 세상은 안개에 덮인 덕유산의 새하얀 풍경을 조금씩 벗겨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눈꽃 세상은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다. 존재의 고마움, 오늘이 있음에 감사했다. 산에서 내려가 서울로 복귀하면 별반 다를 바 없는 생활이 이어지겠지만, 이 순간, 눈을 통해 새겨진 풍경, 마음에 새겨진 다짐은 잊을 수 없으리. 처음으로 돌아가기보다 오늘이 처음이다. 오늘 다시 시작이라는 다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 거대한 자연 속에서 이 작은 존재가 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전부다. 아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